2011.09.19 00:06
하나님은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셨으나,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몹시 화가 났습니다. 그리하여 동생 아벨을 죽일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그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죄가 너의 문에서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하지만 결국 가인은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동생을 쳐죽이고 말았습니다. 그에 대해 하나님은 책임을 물었습니다. 곧 밭을 갈아도 효력이 나타나지 않고, 땅 위에서 쉬지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인이 화가 났을 때부터 시작하여 죄를 짓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기까지, 가인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세 단계로 나누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주의를 주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동생을 죽일 마음을 품은 것을 아시고, 죄가 너를 지배하려 하니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고 주의를 주셨습니다. 이는 가인이 죄를 짓는 것을 방관하지 않으셨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단계는 허용하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의를 받았지만 가인은 죄를 물리치지 못하고 동생을 죽이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가인의 그 끔찍한 행동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그 행동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셋째 단계는 책임을 묻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은 동생을 죽인 가인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물으셨습니다. 흔히 우리는 이를 벌이라고 표현합니다.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벌이라고 표현해도 좋지만, 저는 이를 책임을 묻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벌을 받는 것과 책임을 지는 것은, 형태는 갖을지라도 그 의미는 사뭇 다릅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가인에 대해 세 단계로 반응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국가도 국민의 범법행위에 대해 이와 비슷하게 대처합니다. 우선 법률을 제정하여 이러저러한 범법행위를 하면 처벌을 받는다고 주의를 줍니다. 그리고 그런 범법행위를 하면 감옥에 가두고 처벌을 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달리 국가는 둘째 단계인 허용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지난 시간에 허용에 대해 살펴보았지만 오늘 좀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유명한 <탕자의 비유>를 보면 바로 이 허용이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산 가운데 자신의 몫을 미리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의 그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곧 그의 행동을 허용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재산을 주었습니다. 며칠 후 작은 아들은 자신의 재산을 다 챙겨서 먼 지방으로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그 때도 집을 떠나가는 그의 행동을 허용하였습니다. 그의 선택이 바르지 않음을 알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작은 아들은 집을 나가서 방탕하게 생활하며 재산을 낭비하였습니다. 결국 재산을 모두 탕진하게 되었고 빈털터리가 되어 굶주리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자신의 행동에 대해 후회를 하였습니다. 그는 회개를 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질책하기는커녕 오히려 잔치까지 벌이며 반가이 맞아 주었습니다.

    이 비유를 보면 첫째 단계인 주의를 주는 과정이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작은 아들의 행동이 범죄행위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일 겁니다. 또 셋째 단계인 책임을 묻는 과정도 빠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굶주리며 고생한 것을 통해 이미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진 것이 되고, 또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진심으로 회개를 하였기에 책임을 진 것과 다를 바 없게 된 것입니다. 아무튼 이 비유에서는 둘째 단계인 허용이 잘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흔히 인간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곧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허용하신다는 사실을 잘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따라 타인의 행동에 대해 허용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허용은 내 뜻과 다르게 상대방이 행동하는 것, 혹은 내 기준에 안 맞게 상대방이 행동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 허용은 상대방의 행동을 언제나 긍정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허용하지 않는 마음일 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상대방의 행동에 대해 언짢아하거나, 비난하거나, 더 나아가 화를 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행동을 부정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내 뜻과 다른 행동을 하였을 때, 내 기준에 안 맞게 행동하였을 때, 우리는 두 가지 반응 중의 하나를 하게 됩니다. 하나는 그 행동을 긍정으로 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행동을 부정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이렇게 생각합니다. 상대방의 행동을 긍정으로 대하는 것이 좋겠지만, 때로는 부정으로 대해야 할 때가 필요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상대방이 큰 범죄를 저지르려 하는데 그걸 긍정으로 대하면 안 될 것입니다. 힘을 다해 막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범죄행위가 일어나기 전에 그 일을 아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대개는 그 일이 일어난 후입니다. 그렇게 일이 이미 일어났다면, 그 때는 긍정으로 대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긍정으로 대한다는 것은 그 일을 좋게 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허용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그리고 매스컴을 통해 내 뜻과 같은 타인의 행동, 내 기준에 맞는 타인의 행동을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를 만나는 일이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부정으로 대한다면 내 속은 얼마나 시끄럽겠습니까? 그런 삶에는 언제나 다툼과 갈등이 끊이지 않게 됩니다. 물론 모든 일에 긍정으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을 겁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정으로 대하는 경우가 더 많은 사람과 긍정으로 대하는 경우가 더 많은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현재 어느 쪽이십니까?

    저는 매일 아침에 신문을 보며 선행 기사를 오려 둡니다. 그런데 그 일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수많은 기사 중에서 선행 기사는 아주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래 결국 선행 기사를 하나도 만나지 못하는 날이 허다합니다. 그러니까 신문은 언짢은 마음이 되거나 더 나아가 분개하게 되는 기사로 도배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 어떤 사람은 신문을 보지 말고, TV 뉴스를 가급적 듣지 말라고 합니다. 인터넷 기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화로운 마음을 유지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유지되는 평화로운 마음이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 의문을 갖게 됩니다. 시간과 돈을 투자하여 스스로 언짢고 분개하는 마음에 빠져들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외면하고 살 것인가, 이는 딜레마입니다.

    여기 제 3의 길이 있습니다. 신문에서 부정적 기사를 읽고 있노라면 자동적으로 언짢은 마음이 올라오게 됩니다. 그 순간에 속으로 ‘그럴 수도 있겠지’, 혹은 ‘무슨 사정이 있겠지’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여 올라오는 언짢은 마음을 허용하는 마음으로, 부정의 마음을 긍정의 마음으로 바꾸는 겁니다. 훈련이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 반복된 훈련을 통해 우리는 차츰 긍정의 존재로 자라나게 됩니다. 따라서 부정적 기사로 도배가 되어 있는 신문은, 허용하는 마음을 구비하기 위한 아주 좋은 훈련의 장이 됩니다.

    최근에 인터넷에서 우연히 어떤 목사님의 설교문을 읽게 되었는데, 거기 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는 겁니다. 설교문에서 저와 관련된 부분만 복사하여 가져왔습니다. 그것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나는 나만의 광야를 알고 있는가? 종종 찾아가는 자신만의 광야를 품고 있는가? 그곳에서 하나님을 향하는가? 침묵하는 일은 우리 생활에서 가장 쉽게 할 수 있으면서,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예전 구로동에 노동자선교를 하는 신명교회가 있었다. 담임자가 노창식 목사였다. 그는 말을 참 잘하는 재담꾼으로 유명하였다. 어떤 모임에서든 말로 분위기를 사로잡는다. 그가 한 번은 일주일간 침묵 수련회에 다녀온 일이 화제가 되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좋아하는 양반이 어찌 침묵의 시간을 견뎠을까 궁금해 하였다. 그런데 화제가 된 것은 그가 침묵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사람을 더 놀라게 한 것은 그가 일주일 동안 침묵 수련회에 다녀온 후 인근 후배 목사들을 불러 모아 놓고 침묵 수련회가 얼마나 유익했던지, 밤이 새도록 이야기 해주었다고 한다. 역설이다. 행여 우리는 그런 역설 속에 살지 않는가?>

    그 목사님은 침묵의 중요성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잘못된 침묵의 예를 들면서 제가 등장한 것입니다.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진실은 이러합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긴 있었던 모양입니다. 다만 주인공이 제가 아니라 제 친구인 H목사입니다. 10년쯤 전에 제 후배 목사로부터 H목사가 어느 침묵 수련회에 다녀와서, 목사들을 모아 놓고 침묵 수련회가 얼마나 유익했는지 밤새 이야기 하더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 후배 목사는 H목사의 그 모습에 대해 약간 부정적으로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설교문을 인터넷에 올린 목사님은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하여 저의 명예를 훼손한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저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분을 전혀 모릅니다. 설교문을 읽으며 처음으로 그분의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 설교문을 읽고 저는 두 가지 반응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하나는 언짢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냥 일어난 일을 허용하는 것입니다. 저는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물론 허용한다 하더라도 시정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허용하는 것과 시정을 요구하는 것은 결코 충돌하지 않습니다. 가인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세 단계로 진행되었음을 기억해 보십시오. 주의를 주고, 허용하고, 그리고 책임을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허용은 책임을 묻는 것과 병행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허용을 할 뿐 시정을 요구하거나 책임을 묻지 않기로 했습니다. 오히려 덕분에 그 이야기를 예화로 사용할 수 있게 됨에 감사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이 말씀을 따라 이렇게 말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니 나도 허용한다.” 이런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아닐까요? 그는 이런 고백으로 살아갑니다.

    
“내가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을 때도, 누군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내 안에 큰 빛이 있음을 모르고 있을 때도, 누군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불타는 욕망의 연기에 잔뜩 그을린 채 내 속의 탕아와 함께 살고 있을 때도, 누군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막다른 길목에서 막막함 속에 앉아 있을 때도, 누군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작고 보잘것없는 꽃 한 송이 피웠을 때도, 누군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보다 더 크신 이의 자취를 알아채고 기뻐할 때도, 누군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오늘 내가 이렇듯 삶을 긍정하는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은, 누군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기 때문이니, 그분은 바로 하나님 당신이 아니옵니까?”

    허용하는 것, 긍정하는 것,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이 모두 같은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행동에 대해 긍정하시고 허용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나만을 허용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타인들도 허용해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허용해 주시는 타인들에 대해 내가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게 바른 길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허용해 주시고 또한 타인들을 허용해 주시니, 나도 타인들을 허용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수준이 아직 낮아 타인들의 모든 행동을 허용해 주지 못합니다. 타인들의 행동에 대해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경우보다 고개를 가로젓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허용치 않으려는 마음이 올라올 때, 허용하려는 마음으로 바꾸려는 훈련을 부단히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차츰 허용의 범위를 넓혀갈 것입니다. 고개를 가로젓는 경우보다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경우가 더 많아질 것입니다. 우리는 날로 너그러운 존재로 자라날 것입니다. 날로 순한 존재로 자라날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내면에 하나님의 평화가 아름답게 피어오를 것입니다. 나의 모든 행실에 대해 고개를 끄덕여 주시는 분 안에서,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 고개를 끄덕여 주는 존재로서 살아가는 기쁨이 우리 안에 가득할 것입니다. ◈

Posted by 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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